배론으로 향해야 겠다고 생각한 건, 김훈 작가의 소설 [흑산]을 읽어내려가던 새벽녘이었어요.
사영의 다급했던, 혹은 죽음을 직감하면서도 담담했을,
그 숨결을,
기운을
조금이나마 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추적추적, 겨울을 부르는 비를맞으며 동이 트기 전 서울발 제천행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두 시간여를 달려 내려간 그곳에서, 나는 이내 충동적인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서울의 버스체계와는 전혀 다른 이곳에서 어떤 버스를 타야할 지 전혀 몰랐던 것이지요.
정류장에는, 그곳에 서는 버스와 노선도가 적혀 있지 않고,
제천 시내에 돌아다닐 전 버스들의 시각만 빼곡하게 적혀 있었답니다.
내가 서 있는 정류장에 몇 번 버스가 서는지,
그 버스는 어디를 향하는 것인지 전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가게에 들어가 점원에게
'내가 배론을 가고 싶은데 혹 어떻게 가는 지 아세요?'라고 물어보니, 모르겠다는 웃음만 돌아왔습니다.
나는 또 거기에 대고 '그럼 여기 버스는 어떻게 타는 거예요?'라는 우문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또 다시 똑같은 웃음만이 돌아왔지요.
다시 정류장에 섰습니다.
중학생 정도나 되어 보이는 주근깨가 가득한 소녀에게 혹 배론 행을 아는지 물었습니다.
소녀도 역시 모르더군요. 다시금 우문을 했습니다.
버스 어떻게 타는 거냐고.
소녀는 나에게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아하, 이곳의 버스는 우리가 종점 방향을 보고 지하철을 타듯,
종점의 향방을 알고, 이를 기준으로 타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정류장에 선 지 30여 분 만에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서 있는 정류장에 내가 찾는 버스가 서는 줄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소녀는 제천 시내의 가장 중심이 되는 환승지를 알려주며,
그곳에서 내가 찾는 버스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무턱대고 지나가는 아무 버스나 잡아탔습니다.
그러고는 기회를 보아 기사님에게 물었지요.
'기사님, 배론행을 아시나요.'
기사님은 정 반대 방향으로 버스를 탔다고 일러주셨습니다.
그러곤 뒤이어 오는 버스로 갈아타 아까 소녀가 말해준 환승지로 가라는 가르침을 주셨죠.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그 환승지에는 많은 할배, 할매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스마트 폰을 폭풍 검색하고, 우문에 대한 현답을 추론해낸 끝에
내가 가는 배론은 학산리행 버스를 타면 도달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스마트 폰을 검색하고 있던 내게, 정류장에 서 계시던 한 할배는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거, 학생 지금 시간이 몇 시오?'
'네? 열 한 시 반이요.'
순간적이었지만,
나는 요즘같은 때에도 휴대전화기 없이 외출할 수 있는 할아버지의 그 여유로움이 부러웠습니다.
'허, 참, 아직도 학산 행 버스가 10분이나 남았네 그려.'
내게 말은 건네신 할배는 우연히도 나와 행선지가 같았습니다.
'학산 가세요? 저도 그리로 가는데. 저는 배론으로 가려고 하거든요.'
'배론? 이거 타면 그리로 안 갈텐데.'
'네. 아는데요. 배론행으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몇 대 없더라구요. 그래서 가다가 탁사정에서 내려서 가려고 해요.'
옆에 계시던 또 다른 할머니가 말을 받으셨습니다.
'그럼 조금 걸어야 할텐데.'
'네. 좀 걸어가려구요.'
할배는 말없이 빙긋 웃으셨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버스를 타고, 배론 입구에 내렸습니다.
안내판은 배론이 이곳에서 3km 떨어져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찬찬한 걸음으로 한 시간 내외. 조금 빨리 걸으면 삼 사십 여분이면 도착하겠다 싶었습니다.
겨울을 부르는, 추적추적한 이슬비는, 온 몸에 한기를 전해주며, 찬찬한 걸음보다는
빠른걸음을 걷도록 재촉했습니다.
몸에 열을 내기 위해서, 걸으며 시내에서 조금 전 구입한 샌드위치로 허기진 배를 채웠습니다.
가끔, 성지로 향하는 자동차만이 몇 대 있을 뿐,
인가도 매우 드문, 꼬불꼬불한 치악의 자락이 이어졌습니다.
사실, 배론에 가야겠다는 충동적인 생각의 이면에는 피정을 해보고 싶다는 낭만적인 객기도 작용하였더랬습니다.
그러나 삶에의 의지를 일깨우는 찬 공기와 적막한 기운은 버스가 끊기지 전에 배론을 다녀와야 한다는
생각만을 머릿 속에 가득차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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