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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기/Humanitas관찰기

공포와 전율(혹은 두려움과 떨림) - 키에르케고르, 정리 및 생각 / 나는 침묵한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칠 것을 요구하신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간다.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묻는다.

"제사를 지낼 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준비해 주실 것이다."

그렇게 80세에 얻은 소중한 아들과 기력이 쇠한 아버지는 뚜벅뚜벅 모리아 산으로 향한다.

...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칼을 번쩍이는 순간.

하늘에서 신의 음성이 들린다.

멈추어라.

신의 요구에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

분신과도 같은 아들을 바칠 마음의 준비까지 했던.

아브라함은 이렇게 신에 대한 믿음을 증명해 보인 후 믿음의 조상이 된다.

그리고 여호와 이레.

준비하시는 하나님.

성경의 말씀은 이처럼 훈훈한 결말을 보여준다.

그런데 어떤 신심이 깊은 신자가 이 이야기를 너무나 감명깊게 들은 나머지

자신의 자식을 신의 명령이라며 바치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믿음의 조상이라며 치켜 세울 수 있을까?

통찰력이 깊은 어떤 독자들은 이 훈훈한 이야기에 즉각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우리의 똑같은 행동에,

다른 하나는 신실한 신앙의 표현으로,

또 다른 하나는 종교적 광기로 구별하는 구분점은 무엇이란 말인가?

..

신앙이란, 쉽게 달성되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믿는 다는 것은, 무한한 전능자가

유한한 인간에게 추상적인 복을 주실 것이라는,

기복적인 믿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앞에 자신의 가장 소중한 어떤것을, 가장 소중하다는 표현으로도 모자라는,

그러한 어떤 것을 기꺼이 포기할 준비가 되었다는 자세.

그러나 이와 같은 무한한 자기 체념에 멈추지 않고,

무한한 전능자가 유한한 자신의 그 포기될 어떤 것을,

기어이 받아내지는 않을 것이라는

모순된 믿음이 공존하는 역설이 존재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앙의 기사는 앞서 말한대로 이미 무한한 자기체념 자세에 있기 때문에

신이 펼쳐내는 상황, 그러니까 이삭을 제물로 바치지 말라는 그 명령 앞에서

다시금 놀라고 만다.

이와 같은 이중의 운동, 무한한 자기체념과 부조리를 믿는 믿음을 가진

신앙의 기사는,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서 늘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신앙을 유지한다.

자신이 원치 않는 결말에 대한 두려움, 공포.

그럼에도 신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자세.

종교적 광기와 믿음의 조상을 구분짓는 신앙이란 바로 이와 같은 삶에의 마주한

지극한 공포와 떨림, 그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의 영역에서 인간의 보편적 윤리관은 정지하게 된다.

보편적인 윤리의 영역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제사의 제물로 바친다는 것이

용납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려움에 떠는 신앙의 기사에게는 신의 명령이 곧 절대적인 진리가 된다.

신의 명령에서 보편적 윤리라는 잣대는 장애물이 될 뿐이다.

신앙이라는 것.

그것은 보편적인 윤리관에 따르는, 보편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 앞에 선 단독자' 로서 신과의 절대적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공포와 전율의 신앙의 기사는

그럼에도, 우리의 마음을 또 다른 의미에서 공포와 전율에 떨게 만든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이 거룩한 신의 명령을 수행한 것이라는 주장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덴마크의 이 우울하고 진지한, 그래서 매력적인 철학자는

이러한 비극을 예상이라도 한 듯,

이삭과 같은 희생의 전제에는 증오가 아닌 사랑이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한다.

말인 즉슨, 아브라함은 온 영혼을 다하여 아들 이삭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은 이와 같은 주장에 비춰보면,

온 영혼을 다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증오에 찬 정치적 선동이었으므로,

그것은 신앙의 운동이 아닌,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녕 신의 음성을 들었다는 어떤 신자가,

세상의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자녀를 죽였다면,

그리고 그것이 신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음이라고 말하는 종교적 광신자가

없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점에서 키르케고르의 주장은 여전히 문제적이다.

또한 아브라함의 행위와

그러한 행위를 이끈 신의 요구 역시 문제적이다.

그러나 성서의 역사적, 상황적 맥락을 살펴본다면

약간의 이해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모세의 율법이 있기 전,

장자(primogenitum)의 희생이

(어떤 때 장자의 희생을 요구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드물지 않았을 때 일어났다 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자신의 행동이 부조리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대의 문화적 맥락에서 완벽하게 윤리적인 설명이 가능하고,

이는 당대의 사람들 역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아브라함은 완벽하게 신앙의 기사가 아닌,

윤리적 영웅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오히려 성경이 보여주는 신의 개입과 아들이 희생되지 않는

여호와 이레의 상황이,

당대의 비윤리적인 관행을 꼬집어 내는

내용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이해가 가능하다면,

성경의 이야기는 남고, 키르케고르의 종교적 실존의 단계는 붕괴한다.

그러나 여전히 고민은 남는다.

만약 그렇다면,

전적으로 신을 믿는 사람이 있을 때,

그에게는 보편적인 윤리가 선행하는 것인가,

아니면 신의 명령이 선행하는 것인가.

전자를 따른다고 했을 때, 그에게는 신이 필요없다.

인간들의 보편적 이성이 만들어낼 수 있는 여러가지 윤리적 규범들만 있으면

인간에게 간헐적으로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요구를 하시는 신까지 만들어내

그렇잖아도 힘든 인간들을 스스로 귀찮게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만약 이렇게 된다고 했을 때,

이는 '신을 믿는 사람이 신자다'라는 정의와 논리적 모순을 일으킨다.

후자를 따른다면,

여전히 나치적 상황, 혹은 종교적 광기의 상황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내려줄 수 없다.

그럼, 신을 믿지 않는 것이 하나의 방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기와 같이 진정으로 신의 존재가 확신되는데, 어떻게 할까.

신이라면,

보편적인 윤리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명령하실 것이라 말하는 것?

그러면,

신이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낸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신이라면, 그것을 초월한 어떤 것이 있을 것인데?

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나는.

신이 어떤 명령을, 내 삶에서 어떤 제물을 요구하실 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러한 요구, 혹은 명령이 내 보편적 윤리관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이삭의 죽음 앞에서 개입한 이레의 역사가

내게 주어지는 신의 명령의 순간에 펼쳐질 것이라는 믿음.

오직 공포와 전율 속에서 그것만을 가지고 사는 것 뿐.

나는 신앙의 기사나 영웅이 되기를 원치 않을 뿐더러,

윤리적 영웅이 되기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의 존재를 믿을 뿐더러,

그 앞에서 단순한 신앙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미약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논리적 극단에서서,

지극히 비논리적이고, 부조리한 신앙의 고백을 한 나는

이내

침묵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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