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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승전국들의 어긋난 전후 구상 – 국제연합의 창설과정과 헌장

kierk 2015. 10. 14. 00:33

이 글은 과제 수행 후 약간의 수정을 거쳐 게재 하는 것임.

Ⅰ.

전쟁은 인간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따라서 큰 전쟁이 있고 난 이후에는 정치, 군사, 사회, 문화의 모든 면에서

이전과는 구별되는 변화의 단층이 목격되고는 하지요.

국제 정치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럽의 30년 전쟁을 종결지었던 베스트팔렌 조약(1648)은

'군주가 자신의 영역의 지배자이고, 그 안에는 상위의 존재가 없다'라는 내용을 함의함으로써 

근대국가의 탄생을 알려왔어요.

반면, 나폴레옹 전쟁이 있은 이후에는 유럽협조체제(Concert of Europe)가 형성되어

1차 대전이 발발하기까지 비교적 평화로운 국제질서를 유지하였죠.

마찬가지로 전례 없는 총력전으로서의 1차 대전과 2차 대전 역시 국제정치 영역에서 큰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그런데 이상에서 열거된 큰 전쟁들 중에서 현재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전쟁이라면 

단연 2차 세계대전을 꼽을 수 있을 것이에요.

이는 2차 대전이 위에서 열거한 큰 전쟁 중에 가장 최근에 일어났던 사건이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현재 우리가 사는 삶의 방식이 2차 대전의 결과에 구속되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가장 크기 때문입니다.

추축국과의 대결을 벌였던 2차 대전의 승전국들,

그 중에서도 연합국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미국은

전쟁 이후 자신들의 관념과 제도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를 형성하였어요.

달러를 기축통화로 한 브레턴우즈체제를 형성하였고,

'평화를 사랑하는 국가들'의 모임인 국제연합의 창설을 주도하여 집단안보체제를 유지하려 하였던 것이죠.

이처럼 소위,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라 불릴 수 있는 전후 체제는

현재 부상하는 중국의 베이징 컨센서스(Beijing Concensus)의 도전을 받는 형국처럼 보이지만,

워싱턴 컨센서스의 영향력을 완전히 무시하기에는 아직 이른 측면이 있어요.

여전히 전후의 유산으로 구축된 제도들이 국제정치의 영역에서 제 역할을 일정부분 담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중동의 '재스민 혁명'의 여파로 촉발된 리비아의 내전에서,

독재자 카다피의 자국민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 행사의 우려가 제기되자,

국제연합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가 '주권에 대한 불간섭'이라는 불문율을 깨면서까지 

리비아 사태에 개입하였던 사례를 들 수 있어요.

이처럼 국가 상위에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국제정치의 장에서

국제연합은 마치 국가 상위의 존재처럼 일정부분 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답니다.

결국, 그 영향력이 점차로 빛을 바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2차 대전의 유산에 머물러 있다고 볼 수 있어요.

따라서 국제정치 영역에서 주요한 행위자로 기능하는 국제연합의 창설과정과 국제연합의 헌장을 살펴봄으로써

승전국들의 전후 구상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를 통해, 승전국들이 생각했던 초기의 구상들이 어떻게 헌장에 반영되었고,

그것이 20세기 전반의 마지막 순간을 거치면서 현실과 어떤 괴리를 보여 왔으며,

이에 따라, 현재의 국제정치 영역에 어떠한 의미를 남겼는가를 살펴보고자 해요.

 

Ⅱ. 국제연합의 창설 과정

 

2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는 시기 동안,

추축국에 대항하는 연합국의 지도자들은 전쟁의 수행과 전쟁 이후의 예상되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여러 차례 회동하여 의견을 교환하였어요.

이와 같은 국제회의의 주요 내용들은 전후의 예상되는 국가들의 영토문제,

그리고 2차 대전의 발발을 막지 못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을 대체할 

새로운 국제기구의 창설을 주요 골자로 하는 것들이었어요.

국제연합이 창설되는 과정에서 주요하게 논의된 국제 회담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서양헌장(1941).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 대전이 한창이었던 1941년, 

미국의 루즈벨트와 처칠은 회동하여 대서양 헌장(Atlantic Charter)을 선포하였다.

이는 독일의 히틀러가 제창한 유럽의 신질서, 

그리고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선전에 대항해 내놓은 연합국의 새로운 국제질서에 관한 비전이었다.

대서양 헌장에서는

① 영토적 확장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확장은 추구하지 않음.

② 주민의 의사에 반대되는 영토변경을 추구하지 않음.

③ 모든 국민들의 정부형태 선택권은 존중되며 박탈당한 주권을 회복하도록 함.

④현존하는 의무들을 준수하며 모든 국가들이 무역과 천연자원을 획득하는 데 균등한 대우를 받음.

⑤ 경제 분야에 있어서 모든 국가들은 서로 최대한으로 협력.

⑥ 나치가 멸망된 이후 평화로운 세계를 건설.

⑦ 공해 자유 원칙을 준수

⑧ 힘의 사용을 폐지라는 여덟 가지의 원칙에 입각한 전후 질서가 형성되어야 함이 천명되었다.

 

워싱턴회의(1942).

대서양헌장에서 상호 간의 합의를 이뤄냈던 영국과 미국은, 

대서양헌장이 발표된 이후에도 전쟁의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회담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영국을 비롯하여 26개국이,

-추축동맹이라는 공통의 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동맹으로 묶기기 힘든, 

미국과 영국, 중국, 그리고 남미의 여러 국가들 등-

국제연합 선언(Declaration of the United Nations)를 발표하여,

추축국에 대한 공동항쟁과 단독강화 금지,

대서양헌장의 원칙을 인정함과 동시에 국제연맹을 대체할 새로운 국제기구를 창설하는데 동의하게 된다.

 

덤바턴 옥스회의(1944).

1944년 9월에는 미국과 소련, 그리고 영국의 대표단이,

10월에는 미국 영국, 중국의 대표단이 워싱턴 D.C의 덤바튼 옥스에 모여 

국제연합에 관련한 주요한 문제들을 결정지었다.

국제연합은 모든 회원국으로 구성된 총회와 강대국들을 영구회원으로 하는 안전보장이사회(이하 안보리),

사무국과 국제사법재판소, 경제사회 이사회 등으로 구성한다는 내용에 합의하고,

안보리가 평화와 안보를 유지하는 데 주요한 책임을 갖는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였다.

 

얄타회담(1945. 2).

얄타회담은 2차 대전 당시의 전시 회담 중에서 그 중요성이 가장 큰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독일과 폴란드에 관한 국경문제, 

소련의 대일전쟁 참여에 관한 여러 문제들이 논의되었으며, 

국제연합과 관련한 사항들도 논의되었다.

특히, 덤바턴 옥스회담에서 합의를 보지 못했던 사안들이 얄타회담을 통해서 많은 부분 의견의 일치를 보였다.

소련의 연방 공화국을 국제연합의 회원국으로 인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덤바턴 옥스회의에서 불거진 이견이

얄타에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시 두 국가에 대한 회원을 인정하는 타협안을 통해 중재되었고,

안보리 내에서 의사결정 절차 역시 절충되었으며, 영토문제, 신탁통치위원회의 설립에 관해 합의를 보았다.

 

샌프란시스코 회의(1945 4).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는 기존의 회의들 중에서 가장 많은 46개국이 참여한 가운데 열리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의 회의의 내용들은 이전의 내용들과 크게 구별되지 않았다.

모든 국가가 평등한 1표를 행사하는 총회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영국, 소련, 프랑스, 중국이라는 다섯 개의 강대국은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 되어,

모든 의사결정에서 주도권과 지도력을 지니는, 다른 국가들과는 차별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부차적인 안건에 대해 양보를 얻어낸 약소국들은 회의의 결과에 순응하였다.

이로써 1945년 6월 폴란드를 포함한 51개국 대표들은 국제연합 헌장에 서명하였고,

서명한 각 국가들은 의회의 비준을 받아, 10월 국제연합이 탄생되었다.

 

Ⅲ. 국제연합 헌장의 주요 내용.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45년 4월에 시작된 샌프란시스코 회의를 통해 국제연합 헌장이 만들어지고,

51개국의 서명과 비준을 받게 되었어요.

19장 111조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국제연합 헌장은

국제연합의 창설 목적과 주요 기구, 의사결정 방식 등을 명시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국제연합의 목적인 1장과 안보리 임무와 권한을 명시한 5장,

분쟁의 평화적 해결이 명시된 6장, 7장의 평화에 대한 위협, 평화의 파괴 및 침략 행위에 대한 조치를 중심으로

그 주요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려고 해요.

 

1장. 목적과 원칙.

제 1조 1.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고, 이를 위하여 평화에 대한 위협의 방지 및 제거, 침략행위 또는 기타 평화파괴를 진압하기 위한 유효한 집단적 조치를 취하고 … 정의와 국제법의 원칙에 따라 실현한다. 2. 민족들의 평등권 및 자결원칙의 존중에 기초하여 국가 간의 우호관계를 발전시키며, 세계평화를 강화하기 위한 기타 적절한 조치를 취한다. 3. 경제적사회적문화적 또는 인도적 성격의 국제문제를 해결하고, 인종성별언어 또는 종교에 따른 차별 없이 … 국제적 협력을 달성한다.

 

제 2조 1. 국제연합은 모든 회원국의 주권평등 원칙에 기초한다. 3. 모든 회원국은 국제분쟁을 국제 평화와 안전 그리고 정의를 위태롭게 하지 아니하는 방식으로 평화적 수단에 의하여 해결한다.7. 이 헌장의 어떠한 규정도 본질상 어떤 국가의 국내 관할 권한에 있는 사항에 간섭할 권한을 국제연합에 부여하지 아니하며, … 다만, 이 원칙은 제 7장에 의한 강제조치의 적용을 해하지 아니한다.

 

국제연합이 창설된 목적과 국제연합의 운영원칙을 명시한 제1조와 제2조는,

주권의 평등 원칙에 기초하여 각 국가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국가 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전쟁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평화를 위협하는 국가가 등장하여 이를 위협 또는 파괴한다면,

국제연합은 집단안보를 위하여, 강제적 행동을 포함한 모종의 행동을 취할 수 있음을 언급하였어요.

또한 국제연합은 국가 간의 분쟁의 원인이 정치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경제사회문화 분야에서도 기인한다는 문제인식 하에 

이러한 영역에서의 국제협력 역시 증진시킬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답니다.

 

제5장 안전보장이사회

제 24조 1. 국제연합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조치를 확보하기 위하여, 국제연합 회원국은 국제 평화와 안전의 유지를 위한 일차적 책임을 안전보장이사회에 부여하며, 또한 안전보장이사회가 그 책임 하에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 회원국을 대신하여 활동하는 것에 동의한다.

 

국제연합 안보리의 권한과 책임 등을 명시한 제5장에서는

국제연합의 주요 다섯 기구, 즉 총회와 안보리, 경제사회 이사회, 사무국, 국제사법재판소 중에서

국가 간의 분쟁이 발생할 경우,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기구로서 안보리를 명시함으로써,

강대국 중심의, 그 중에서도 2차 대전의 승전국 중심의 모임이 전후에도 지속될 것임을 확고히 하였어요.

 

제6장 분쟁의 평화적 해결

제 33조 1. 어떠한 분쟁도 그 계속이 국제평화와 안전의 유지를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는 것일 경우, 그 분쟁의 당사자는 우선 교섭, 심사, 중개, 조정, 중재재판, 사법적 해결, 지역적 기관 또는 지역적 약정의 이용 또는 당사자가 선택하는 다른 평화적 수단에 의한 해결을 구한다. 2. 안전보장이사회는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당사자에 대하여 그 분쟁을 그러한 수단에 의하여 해결하도록 요청한다.

 

제33조에서는 제2조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국가 간의 분쟁이 발생했을 때, 이러한 갈등을 해결할 평화적 수단을 구체화 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에는 조정과 중개, 중재재판, 사법적 해결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조정과 중개는 국가 간 분쟁의 원인에 대해서 제3자가 언급하면서 분쟁의 해결안까지 제시해줄 수 있는 개념이며,

중재재판, 사법적 해결은 분쟁을 해결하는데 있어 

공정객관적인 제3자에게 해결책을 위임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개념에 해당해요.

 

제7장 평화에 대한 위협, 평화의 파괴 및 침략행위에 대한 조치

41조. 안전보장이사회는 그 결정을 집행하기 위하여 병력의 사용을 수반하지 아니하는 어떠한 조치를 취하여야 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으며, 또한 유엔 회원국에 대하여 그러한 조치를 적용하도록 요청할 수 있다. 이 조치는 경제관계 및 철도, 항해, 항공, 우편, 전신, 무선통신 및 다른 교통통신 수단의 전부 또는 일부 중단과 외교관계의 단절을 포함할 수 있다.

 

42조. 안전보장이사회는 제41조에 규정된 조치가 불충분할 것으로 인정하거나 또는 불충분할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국제 평화와 안전의 유지 또는 회복에 필요한 공군, 해군, 또는 육군에 의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러한 조치는 국제연합 회원국의 공군, 해군, 또는 육군에 의한 시위, 봉쇄 및 다른 작전을 포함할 수 있다.

 

국가 간의 분쟁이 발생한 경우,

특정 국가가 제 6장에서 언급한 평화적 해결의 의무조항들을 위반하고,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때, 취할 수 있는 조치들이 제 7장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평화에 대한 위협 혹은 파괴, 침략행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정의가 내려져 있지 않고,

안보리의 판단에 일임하고 있다는 점(제 39조),

침략행위가 발생한 경우 안보리는 곧바로 군사적 개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분쟁의 확대를 방지하기 위한 권고, 혹은 잠정조치를 한 후

이마저도 효과가 없을 때,

비군사적 조치(제41조), 그리고 군사적 조치(제42조)를 취한다는 점을 들 수 있어요.

즉 권고와 잠정조치는 강제이행조치에 선행하는 것이지요.

 

제51조. 이 헌장의 어떠한 규정도 국제연합 회원국에 대하여 무력공격이 발생한 경우, 안전보장이사회가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때까지 개별적 또는 집단적 자위의 고유한 권리를 침해하지 아니한다. …(후략)…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무력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는 국제연합 헌장이지만,

제51조에서는 무력사용의 예외적 상황으로서 (집단)자위권을 발동하는 경우를 들고 있습니다.

이 조항은 근래에 들어, 전쟁의 수단으로서 군대를 보유하지 못하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전쟁을 할 수 없는 일본이 헌법을 개정하고, 

군대를 갖는 보통국가화 행보에 있어 주요 명분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 받고 있습니다.

 

Ⅳ. 국제연합 헌장을 통해 본 승전국의 전후 구상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국제연합의 창설과정에서 이뤄진 국제 회담들과 

그러한 협의들의 주요 성과물인 국제연합 헌장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전후의 강대국들이 생각한 2차 대전의 원인과 

이의 해결을 위한 전후 구상의 일면을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특히, 미국의 지도자였던 루즈벨트는 

대공황에서 비롯된 블록 경제의 형성이 2차 대전이 발발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판단하였어요.

그래서 그는 대서양 헌장을 통해 국가 간의 자유로운 무역을 담보할 수 있는 국제 경제 질서를 형성하고자 하였죠.

그 결과로서 국제연합 헌장에서는 분쟁의 해결을 위한 최상위 기구인 안보리의 창설을 명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제사회이사회를 구성함으로써 국가 간의 갈등을 예방하기 위한 구상을 구체화 하였습니다.

국제연합 헌장이 만들어진 시기에 강대국들이 예상한 전후의 세계는

2차 세계대전의 갈등구도와 마찬가지로 

추축국 동맹에 대항한 연합국 동맹이 한동안 유지될 것이라는 사실이었어요.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이들 연합군 세력은 

전쟁의 폐허 위에서 또 다시 새로운 적을 만들어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소련의 스탈린은 2차 대전 과정에서 독일과의 치열한 싸움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자신들의 이익을 강변하기 위한 명분을 획득하였으나,

전쟁으로 야기된 (다른 연합국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불균등한 바로 그 피해 때문에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적절한 힘을 보유하고 있지는 못하였어요.

따라서 전후 소련이 필요로 했던 요소들은 전후의 평화와 경제원조, 과거의 동맹국들의 협조 등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요건들의 실현을 위해서 스탈린은 미·영과의 대립보다는 이들과의 협조를 기대했던 것이지요.

미국의 루즈벨트 역시 전후 새로운 갈등 보다는 협력을 희망하였어요.

특히, 협력에의 구상은 국제연합 헌장의 내용에 잘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강제이행조치를 명시한 국제연합 헌장 7장의 내용들은

국제 평화를 위협하는 행위, 혹은 침량행위에 대해서 명확한 정의를 내려놓지 않은 채,

이러한 규정을 안보리를 구성하는 국가들 간의 협의로 정할 것을 명시하고 있었다고 말했었죠?(39조)

이와 같은 조항 아래에서는 안보리 상임이사국 간의 갈등,

혹은 특정한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국제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의 합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였어요.

따라서 국제연합 헌장이 만들어질 시기의 강대국들은

독일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과의 갈등구도를 염두에 두고 

이러한 조항을 만들어냈음을 알 수 있어요.

만약 국제연합이 강대국 간의 의견의 불일치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국제연맹의 실패 사례를 그대로 반복하는 꼴에 불과했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연합국의 대동맹이 지속될 것이라는 예상은 미국의 정책을 통해서도 드러나요.

미국은 전후의 갈등구도가 2차 대전에서처럼 독일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의 대결이 될 것이라 판단하고,

이들의 경제적인 능력을 약화시켜 다시는 도발을 하지 못하도록 할 정책을 구상했었답니다.

특히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독일 점령지역에서 산업시설을 모두 해체하여

독일을 18세기 이전의 농업국가로 되돌려 놓겠다는 

미 합참 명령 1067호(JCS 1067)에 바탕을 둔 점령정책을 실시하였어요.

1944년 9월 미국이 독일을 점령하기 시작한 이후,

1947년 7월 JCS 1779호가 시행되기 전까지 독일에 대한 미국의 점령원칙을 명시한 JCS 1067호에서는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억제하기 위해 독일의 산업시설을 축소하고 탈 군사화하며',

'독일의 산업해체에 필요한 조치만을 취하고 

경제재건에 도움이 될 수 있거나 독일 경제를 유지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 정책들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Ⅴ. 어긋난 전후구상 ; 승전국의 전후 구상과 현실의 괴리.

 

그러나 국제연합의 창설과정과 헌장에서 드러난 협력에 대한 희망적인 예상에도 불구하고,

전후의 실제적인 처리과정에 있어서 미국과 소련을 위시한 강대국들은 협력을 이뤄내지 못하고,

갈등 국면으로 치닫게 됩니다.

1946년 유엔 안보리의 처음 회의에서

미국은 이란에서 소련의 철군 지연에 대해 비판하는가 하면,

터키 영토에 대한 소련의 요구에 대해 동부 지중해에 전함을 파견하는 것으로 대응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는 와중에 주소 미국 대리공사였던 조지 케넌은 소련 외교의 특징들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으로서 '봉쇄 정책'을 추진할 것을 주장하였어요.

케넌의 분석은 이란과 터키, 독일에 대한 소련의 대응이 위협적인 것으로 인식되던 당시의 상황과 부합하였고,

이에 따라 미국의 대외정책 기조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47년 3월 발표된 트루먼 독트린과 이후 발표된 '마셜플랜'은

유럽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통해 공산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미국의 구상이 반영된 정책이었어요.

소련은 당연히 자신들의 영향력을 저지할 목적의 정책에 동조할 수 없었죠.

따라서 소련은 마셜플랜의 참여를 거부함과 동시에 코민포름을 창설하여 미국의 정책에 대응하였습니다.

소련의 대응이 자신들의 입장에서 방어적인 성격의 것이었을지라도,

코민포름의 창설과 동유럽에서의 세력공고화 작업은 서구 동맹국들에게 공격적인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특히 48년에 발생한 체코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 사건은

미 의회에서 지지부진하던 마셜플랜이 의회의 최종승인을 받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만들었어요.

이후 소련의 베를린 봉쇄의 실행과 해제,

서구 중심의 나토 창설과 동구권 중심의 바르샤바 조약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속과정은

하나의 위기가 또 다른 위기를 불러오는 '안보딜레마'가 발생한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었어요.

요컨대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정책결정자들은

상호작용 과정에서 누적된 상호 불신과 오식의 영향으로

실질적인 무력분쟁은 없었지만,

전쟁에 준하는 차가운 전쟁, 즉 냉전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소련은 상임이사국으로서 미국중심의 국제연합에 거부권을 남발,

국제연합은 애초의 구상과는 달리, 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상이한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체제에 대항한 협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란 전전(戰前) 강대국들의 전후 구상은,

냉전이라는 예상치 못한 현실과 마주하여 어긋나게 되었던 것이죠.

 

Ⅵ.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제연합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양대 세력이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국제사회의 안정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토대로 야심차게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양대 세력은

전쟁을 진행하는 와중에서부터 쌓여온 상호간의 불신이 누적되어

누구도 원하지 않았고, 예상하지 않았던 냉전이라는 새로운 갈등 국면으로 치닫게 되었어요.

따라서 국제연합은 창설된 초기의 시기부터 현실과 괴리된, '시대착오적' 국제기구로서,

국제사회에서 제 역할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는 미국 중심의 반쪽 짜리 조직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그러나 국제연합의 역할이 애초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하여도,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있을 정도로 국제연합이 무력한 모습을 보였던 것은 아니에요.

특히, 소련이 붕괴된 이후 탈냉전의 시대가 도래 하면서,

인간안보에 초점을 둔 국제연합의 행보는 그 미래를 낙관할 수 있게 하고 있죠.

서론에서도 언급하였던, 보호의 책무(R2P, Responsibility to protect)는

비록 '백인의 부담'이라는 제국주의적 관념과 결부되어

약소국에 대한 주권의 침해로 이어질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다는 한계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인간안보가 국가안보에 선행한다는 이상주의적 신념이 성과를 보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입니다.